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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를 보다가 문득

  • 1월 9일
  • 3분 분량

최종 수정일: 2월 9일

"행님은 왜 항상 최고의 자리 앞에서 거기를 떠나노?"


얼마 전에, 인왕산을 함께 걷다가 부산에서 올라온 재훈이가 갑자기 묻는 거지.


"최고? 거기까지 가본 적이나 있었나, 내가?"


대답 대신 재훈이에게, 아니, 내 자신에게 되물어놓고 나니까, 갑자기 어떤 기억들이 막 스치고 지나가는 거지.

그러고 보니 생전에 할머니도... 나 20대 때? 잘 되던 사업 접었을 때.


'할만 하모 때리치아고 돈 좀 벌만 하모 또 때리치아고! 으이그... 쯧쯧쯧.'


언젠가 엄마도... 맞다. 나 30대... 나 CF 감독 그만둔다고 했을 때...


'고마, 하던 기나 잘 하지. 뭘 또 다른 걸 한다꼬 해샀노. 참말로...'


엄마 속상하다고 울기까지 했었구나... 그러네.

심지어 은주도 예전에 지금 사는 옥탑방에 놀러왔을 때 비슷한 질문...


'오빠 일부러 이러는 거지?'


'뭐가?'


'그냥... 오빠 또 다 버리고 이러고 사는 거.'


'일부러? 뭐가?'


'세상이 보란 듯이 일부러...'


'글쎄... 내가 선택한 거니까 일부러는 맞는 것 같은데, 세상이 보란듯이?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때마다 그냥 마음 가는대로 했던 것 같은데, 이젠 중년이라 그런가? 머릿속에서 파박- 하더니 이제야 내가 왜 그랬었는지 알겠는 거지...


"재훈아."


"어?"


"내 어릴 때 오락 잘 했었거든."


"하하. 뭔들."


"어. 그때 내 오락실서 동네 행님들한테 진짜 많이 맞을 뻔 했다."


"하하하. 있지 있지. 그런 거 있지."


"내가 계속 이기니까. 근데 우리 행님이 싸움을 잘 해서 동네 행님들한테서 맞은 적은 없었고, 뭐."


"하하. 관이햄 세지."


"그니까. 근데, 그런 우리 행님도 내가 자기보다 그림을 잘 그리니까 싫었던 기라. 또 내가 어른들 앞에서 춤도 잘 추고 박수도 많이 받으니까, 한 번은 또 그기 싫어가 자기도 춤 춘다고 췄다가 웃음거리 된 적도 있었고, 완전 어릴 때."


"하하하. 귀엽네."


"그때 그 눈빛들이 갑자기 막 떠오르네. 어릴 때 봤던 그 눈빛들... 그게 참 싫었던 것 같다. 내가 뭔가를 잘 하면, 누군가는 싫어해. 막 괴로워 해. 그래서 어떨 땐 못 하는 척... 재미 없는 척... 대충대충 하다가 져주면서 자릴 비키는 거지. 에이, 인자 재미없다... 카믄서.... 그라고 나면 주변이 평화로워지는 기라..."


"아..."


"왜, 살다 보면 그럴 때 있잖아. 저 사람이 나한테 왜 저러지? 대체 왜 그러는 걸까? 암만 생각해도 내가 저 사람한테 뭘 크게 잘못한 것 같지는 않은데..."


"있지. 있지. 누구나 다 있지."


"우리 동네 광천마트 사건도 그랬고. 진짜 한 1년은 생각해 본 것 같다, 그 일도 어휴..."


"하하하. 맞다. 행님 한동안 그 얘기 마이 했지."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팍- 하고 그게 줄줄이 풀릴 때가 있거든."


"..."


"질투였더라고. 결국은 그게 다 질투심에서 시작된 거였더라고."


그러니까.


"재훈아. 나는 질투심이 참 싫다. 물론 내가 좀 잘 숨겨서 그렇지, 내 안에도 그게 가득하겠지만 어쨌든. 굳이... 굳이... 싶어서 그냥 그 자리를 떠날 때가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질투심에 사로 잡히거나, 혹은 또 원치 않게도 나 때문에 누군가가 질투심에 사로 잡힐 때거나..."


그러고 보니, 맞다. 얼마 전에 효빈이랑 차 타고 공연 가다가 그랬었지. 효빈이가


"형. 형은 그냥 형 하고 싶은대로만 해요."하는데 갑자기 그 생각이 나는 거지.


"효빈아."


"네?"


"예전에 나 회사에 있을 때, 언젠가 한 번은 나한테만 일이 계속 들어오는 거야."


"아, 근데요?"


"그러다 문득 옆을 돌아봤더니, 나 키워준 사수형이 놀고 있더라고."


"아..."


"그래서 회사에다 나 번아웃 온 거 같다고, 정신병 올 것 같다고 일 좀 가려 받고 싶다고 일 몇 개를 날렸었거든."


"아... 그래서요?"


"그래서 사수형한테 일이 몇 개 갔었지. 그러다 한참 시간 지나고나서 그 형이랑 술 한 잔 하는데 형이 갑자기 그러는 거야. 너 일부러 그런 거지? 하면서."


"아.. 형님도 알고 계셨구나..."


"어. 그래서 끝까지 형한테 아니라고 우겼어. 전혀 아니라고. 확실히 속였어.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뭐?"


"와- 나 실제로 그런 상태였더라고. 진짜 거의 정신병자 수준이었어. 이제와 돌아보니, 어찌 보면 그 마음이 오히려 나를 살렸던 거야."


"맞어. 형 그때 엄청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그랬지."


"...그니까."


"..."


"근데 이젠 안 그럴려고... 주변에서 그러는데, 그 형, 이제 감독 안 하나 봐... 서로 연락도 안 하며 살고 있고 뭐..."


"아이고..."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나.. 싶어."


"그니까."


"어. 그래서 나 이제 관객만 생각하려고..."

"잘 생각했어요. 형."


아... 이만큼 쓰고 나니, 그래... 어쩌면 굳이 내가 가면을 쓰고 활동하려 했던 이유도 다 거기에 있었을지도... 진짜 별 이유도 없이 정신병자처럼 계속 가면 써야 된다고 우기면서 여기까지 온 거거든. 그니까. 뭔가를 제대로 더 해보고 싶은데, 혹시나 또 주변에서 뜻하지 않은 누군가로부터 질투 받을까봐, 누군가에게 원치 않게 피해를 주게 될까 봐. 그러면 그 사람 괴롭히는 거잖아. 어떨 땐 심지어 그 사람 인생까지도. 그렇다면 굳이...


맞네. 그랬던 것 같아. 그래서 언젠가부터 내가 선택했던 마음가짐도 '넘버원이 되려 애쓰지 말자. 왜냐하면 그건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야 하는 거니까. 그건 싫으니까. 그래. 그러지 말고 차라리 온리원이 되자. 독보적인 사람이 되자. 아예 다른 존재가 되자! 그러면 경쟁 안 해도 되잖아?' 맞아. 나 그랬던 것 같아.


천재? 글쎄. 하늘이 준 능력? 아니. 관찰력이 조금 더 좋은 거야. 그냥 내 유전자가 조금 더 몰입력이 좋은 사람인 거야. 그러니 보통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하니까, 그러니 싫었겠지. 거기서 질투심이 시작 됐겠지.


질투... 그건 나도 싫지. 그래. 원치 않게도 이런 기질을 물려받은 거라면, 난 그저 늘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면 되겠지. 물론 그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원망이란 감정을 뛰어넘을 수 없는 한... 어쨌든, 그럼에도,


그래! 다시금, 아니 지금보다도 더더욱 부모님께, 또 형이랑 형수, 우리 상화, 그리고 나 믿고 내 곁에서 나랑 같이 살아가주는 소중한 내 친구들, 병채, 원우, 재훈이, 효빈이, 승준이 등등등, (등등등이라 표현해 미안하지만 어쨌든) 그보다 더 고마운 마음으로, 또 내가 물려받은 좋은 기질을 세상을 위해 늘 더 좋게 쓰려고 애쓰며 살아야지. 어. 그건 이미 하고 있으니까. 그니까....

잘 하고 있는 거야. 영곤.


  • '정년이'를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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