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학 - 아리스토텔레스
- YoungKon Joo
- 2021년 5월 11일
- 1분 분량
최종 수정일: 2021년 5월 19일
시인은 자기가 직접 나서서 말하는 것을 극히 삼가야 한다. 그러한 행동은 모방하는 사람인 시인이 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삶의 행복과 불행은 행위에 있고, 비극의 목적도 성격이 아니라 행위다. 어떤 사람의 특성은 성격이 결정하지만, 행복과 불행은 행위가 결정한다. 따라서 비극은 성격을 모방하려고 행위를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모방하기 위해 성격을 포함시킨다. 이렇게 비극의 목적은 행위와 플롯이고, 목적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또 전체가 여러 부분으로 이루어졌다면 각 구성 부분이 질서정연하게 배열되고, 일정한 크기도 지녀야 생명체든 사물이든 아름답다.
전체를 한 번에 파악할 수만 있다면 플롯이 길수록 더 아름답다. 크기와 관련해서는,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행복에서 불행으로, 또 불행에서 행복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개연성이나 필연성이 있다고 인정될 정도로 길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역사가와 시인의 진정한 차이는, 역사가는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하고 시인은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말한다는 데 있다.
ㅡ해제 - 역자 박문재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카타르시스는 우선 사람 속에 있는 감정을 조절해서, 지나치게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적절한 분량의 감정, 즉 이성과 미덕에 부합하는 감정을 지니게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용어를 사용하며 강조하고자 한 것은, 사람이 모든 감정을 미덕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적절하게 경험한다면, 거기에는 즐거움만 있고 고통은 수반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어떤 비극을 보면서 공포와 연민이라는 감정을 경험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오히려 즐거움만 느꼈다면, 그 비극이야말로 제대로 된 비극이라는 것이다.
많은 감정 중에서 공포와 연민을 강조하는 것은 비극이 주로 이 두 감정을 다루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인공이 겪는 비극적인 운명을 보면서 내게도 같은 운명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공포를 느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비극을 통해 그러한 감정을 경험하면, 실제 삶에서 그러한 감정을 조절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고유한 목표는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켜 즐거움을 주는 것임을 누누이 강조한다. 비극은 그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사람들을 도덕적인 미덕과 행복으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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