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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난

  • 1월 17일
  • 3분 분량

어린 시절 밀양에 있던 할머니집, 정확히는 할머니의 집과 구조는 똑같지만 크기는 대략 4배 정도? 그 정도로 더 큰 그 집에서

효빈이랑 안방 안에 앉아 있었습니다. 효빈이는 안방의 왼쪽 구석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나는 안방 가운데에 앉아 연초를 잇달아 피우며 마치 효빈이를 놀리듯이 그를 향해 연기를 내뿜고 있었죠. 그러자 어느 순간 꾹 참고 있던 효빈이가 버럭 화를 내며 내게 말했어요.


"아이 형! 형 때문에 방에 담배 냄새가 다 베서 알바생들이 올 때마다 그냥 가버리잖아!"


나는 그 말에 약간 심통이 나서는 "알았어 알았어! 나가서 피면 되잖아," 하고 밖으로 나가서는 마당 가운데 서서 또 약간 놀리듯이 "나 그럼 여기에 놓을 책상 하나만 사줘라. 여기서 일하게." 했다가, 다시 마당을 기준으로 안방의 맞은 편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의 바로 왼쪽에 붙어있던 그 헛간의 디딤돌에 걸터 앉으며 효빈이를 향해 혼잣말처럼 말했어요.


"아니네. 여기가 좋겠네. 그래! 난 여기로 사무실을 해야겠다. 하하하."


실컷 놀렸다는 마음에 그제서야 마음이 조금 풀린 나는 헛간에 잠시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알지 못하는 얼굴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분주하게 일을 하고 있었죠. 그들이 정확히 뭘 하고 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가 계획하고 있는 뭔가가 나름 잘 돌아가고 있는 그런 풍경 같았습니다.

곧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역시나, 그 옛날 실제의 할머니 집과 똑같은 위치와 구조의, 안방이 있는 건물의 왼쪽으로 붙어있는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갔죠. 거기에서도 사람들이 분주하게 뭔가를 하고 있었어요. 마치 영화 촬영을 준비하는 스텝들의 모습 같달까요? 아무튼 그곳에서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어느순간 뭔가가 뇌리에서 번쩍하고 스쳐지나가자,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며 말했어요.


"아니, 여기 우리 할머니집이잖아! 근데 우리 할머니는 돌아가셨잖아! 그 말은 우리가 여기서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소리잖아!"


그 말에 사람들이 하나둘 "그러네, 그렇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죠. 금세 신이 나버린 난 다시 부엌으로 들어가, 부엌 안에서 연결된 작은 방, 실제로도 있었던 그 작은 방 쪽을 바라보았죠. (여기만 실제의 구조와 완전히 달랐어요. 그 작은 방이 연결된 낮고 좁은 한 층짜리 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5층 짜리 건물의 외벽을 바라보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벽 사이사이에 난 크고 작은 창문의 건너편에서는 각각의 사람들과 가족들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게 뚜렷하게 보였죠. 어떤 이들을 창문을 통해 나를 바라보며 저기 좀 봐, 하며 손가락을 가리키기도 했고, 또 어떤 창문의 뒷편에서는 꼬마들이 나를 바라보고선 키득거리며 손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때쯤 깨달았어요. 나는 깨비형 가면을 쓰고 있었죠.


나는 곧 부엌을 지나 비현실적인 구조의 그 벽을 향해 걸어 갔어요. 그 걸음은 곧 달리기가 되었고, 그렇게 나는 그 마을의 곳곳을 마음껏 뛰어다니기 시작했죠. 아주 신나는 경험이었습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영웅놀이를 하듯 두 팔을 가로로 펼친 해 골목골목을 뛰어다니기도 했고, 아주 낮은 돌담이나 흙담 같은 곳을 훌쩍 훌쩍 뛰어넘거나 그 위를 타며 달리기도 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길에서 놀던 아이들과 마주쳤을 때 나는 괜스레 멋진 척 "난 깨비형이야."하고선 다시 후다다닥 사라지기도 했죠. 우와- 하며 신기해하던 아이들의 표정이 뚜렷이 기억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건너가는 어떤 독특한 형태의 길을 만났고, 그 길의 끝에 다다랐을 땐 그제야 가면을 벗고선 그리 위험하지 않은 높이의 벽을 마주하며 그곳을 뛰어넘으려 안간힘을 써봤어요. 벽이라기보단 훌쩍 위로 뛰면 두 손이 닿고 거기에 매달려서 힘을 내면 간신히 올라갈 수 있는 그런, 낮은 낭떠러지의 아래쪽 풍경과도 같은 모양이었는데, 거기에 매달려 끙끙 대며 위로 오르려다 문득, 내가 달려온 저 뒷길에서부터 지금 내가 마주한 벽 위로 완만하고 길게 양쪽으로 연결된 좁은 골목이 보였고, 그 골목길의 벽마다 아주 낡고 허름한 집의 창과 문들이 빼곡이 있는 게 보여서, 나는 저기로 가봐야겠다, 싶어서는 다시 뒤로 돌아가 오른쪽 골목 마을로 천천히 걸어 올라갔습니다.

마치 재개발이 확정나 사람들이 모두 떠난 마을처럼 흉물스럽게 자리하고 있던 그 마을의 끝에서, 이윽고 이제 몇 발만 더 가면 다음 마을로 갈 수 있는, 폭 1m 가량의 좁은 길로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아주 얇은 바닥면이 와르르 깨지며 그 잔해들이 아래로 쏟아지는 게 보이는 거죠! 이를 어쩌지? 하고 잠시 서 있는데, 바로 오른쪽에 있던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한 9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 아이가, 나를 보더니 반대편 골목 마을을 가리키며 "저기로 가면 쉽게 지나갈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고맙다고 인사를 전한 나는, 왠지 그 아이가 사는 곳이 궁금해서 그 아이의 집으로 함께 들어가 보았습니다. 아주 허름하고 낡은 집이었죠. 그러다 어느순간 꼬마가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내게 물었어요. "아저씨. 혹시 단청팀이에요?" 그래서 나는 다시 가면을 써보이며 말했어요. "아니. 나는 깨비형이야. 너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대변인이지."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꼬마도 갑자기 자신의 가면을 쓰고선 나를 바라보며 웃었어요. 홍길동이었습니다. 하하.


그때쯤 그 꼬마의 할머니가 불현듯 다 벗은 채로 문을 열며 집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꼬마에게 "너도 이제 씻어라." 하면서 말이죠. 그러자 홍길동 꼬마도 이내 옷을 다 벗고선 씻을 준비를 했고, 왜 그랬는지, 나도 옷을 다 벗고선 골목 밖에 나 있는 초록색의 얇은 호스로 물을 틀어 대충대충 몸을 씻기 시작했어요. 그때쯤 밤이 찾아와 달빛이 그 마을을 하얗게 물들이기 시작했고, 어느순간 나는 '어? 굳이 지금 나까지 씻을 필요가 있나?' 싶어 곧 떠날 준비를 하다가, 그렇게 나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냥, 뭔가 귀여워서.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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