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품안의 고양이
- YoungKon Joo
- 2016년 11월 16일
- 2분 분량
고양이 한마리가 내 다리 위에 누워있다.
나는 장난끼가 발동해 수차례나 화들짝 다리를 벌려봤지만,
이녀석은 때마다 발톱을 세워 내 바지에 메달려 암벽등반을 시도한다.
정상에 다다를 때면 녀석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건넨다.
"미아우~"
어미 잃고 끈끈이 쥐덫에 걸려 죽을뻔했던 어린 길고양이였다.
오늘은 왠일로 방 청소를 했다.
음악은 에릭사티를 틀었다.
행여나 가방을 풀고 빗자루를 터는 소리가,
누군가에게는 마치 곧 떠날 사람이 남겼던 마지막 흔적처럼 여겨질까봐 다소 조심스럽기도 했다.
늦은 저녁의 청소라 더 그랬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미뤄둔 청소였으며, 내가 게으른 탓이었으며, 고작 새로운 다짐일 뿐이었다.
그 다짐이 무엇인지는 나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청소 내내 행여 자신의 세계가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 사방팔방 뛰어다니던 고양이를 품에 안고선,
컴퓨터 책상에 앉아 막스 리히터로 음악을 바꿔튼다.
점점 자라는 고양이를 만져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운이 좋다면 까슬한 혀천장으로 내 손등을 핥아주기도 하지만,
호기심이 뿌리내린 어린 고양이의 지금 시기에서의 나를 향한 반응은
대부분 울버린의 발톱이거나 블랑카의 이빨이다.
그 바람에 그동안 할 일 없어 방황하던 내 왼손은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물론 선홍빛이 옅은 소수 단위 밀리미터 두께의 상처들은
기껏해야 예닐곱살 꼬마 녀석들이 "엄마~나 다쳐쪄~"하며 우는 척이나 할 법한 자잘한 것들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어제 내 왼손의 상처들을 바라보며 일기를 쓰려고 어떤 문구를 생각하기도 했다.
"너를 키워내기 위해서는, 나는 이렇게 상처받아야만 하는 거구나.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 정도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지."
그 느낌이 나름 멋있어 보였음에도 굳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던 이유는,
왼손을 바라보며 마음을 떠올렸던 그 순간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면 나는 지금 기억을 조작해 그렇다고 여기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기어이 기록을 하고야 말았으니 그 무엇에도 속아선 안될 일이다.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가급적 내 생각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들려오는 모든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보는 중이다.
그게 누가 되었든 상관없다. 그가 대통령이든 대문호든 낚시꾼이든 길거리 거지든간에 하등 상관이 없다.
흐름 그 자체, 운명일지도 모를 그 모든 경우의 수를 일단 받아들여보기로 한다.
우연히 손에 닿아 하라리를 읽었고 도킨스를 읽었고, 행여 사업에 도움이 될까싶어 베나치도 읽었다.
과학을 주장하는 그들의 화법은 왠지 모르게 상당히 닮아있다.
예수를 깨부수기 위해 진화론을 만들고 그것을 이어왔을 그들 서구의 과학자들은 우리 동양인들이 가진 이런 시점을 알고 있을까?
왜 그렇게 발악발악 싸우고 있는가...
요즘엔 다시 보르헤스를 읽는다.
그에게는 상당히 부처같은 어떤 면이 있다.
어떤 방식이 옳은지는 결코 알 수 없으며, 그런 것은 도무지 없다.
내 무릎 위에 누워서 혼자 놀고 있는 이년의 어린 고양이는
어떤 순간에 돌연 내 팔을 물어뜯거나 내 손등을 핥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이 녀석이 내게 주는 어떤 운명적인 메세지같다는 생각을 할 때가 간혹 있다.
핥는다는 건 '그것은 옳아.'의 의미이고, 핥퀸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의 의미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의 놀이 역시 내 품에 안긴 고양이의 돌연한 반응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말을 하다보니 상당히 과학자들의 어법을 흉내내는 것 같으면서도
니체나 헤세, 그리고 보르헤스의 윤회적인 작법을 따라하려는 의도가 은근 묻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지금쯤 고양이는 내 왼손 엄지를 상처가 나지 않을만큼 아주 부드럽게 깨물고 있다.
어쩌면 나는 이 녀석을 통해 내 마음의 청소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음악은 막스 리히터의 스페이스11이 나오고 있다.
나는 이 곡이 마이클 다나가 쓴 '라이프 오브 파이 OST'의 어떤 곡과 상당히 닮아 있다고 느끼게 된다.
호랑이는 고양이과다.
고양이는 호랑이과다.
그것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라이프 오브 파이'의 호랑이 '리차드 파커'는 파이와 함께 뭍에 도착한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선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그것은 파이가 남들에게 쉽게 말할 수 없었던 절망의 끝에서 확인한 생존 본능이자, 거울 반대편의 또 다른 자신이었다.
만약 거울을 바라봤는데, 그 안의 자신이 나를 외면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리차드 파커의 마지막 뒷모습을 바라보는 파이의 마음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어쩌면 그런 호랑이 새끼 한마리를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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