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장 앞으로 나아가도 그리 멀리 가진 못해." 영원한 이별은 불가능하다는 가설의 증명.
- YoungKon Joo
- 2015년 10월 27일
- 3분 분량
'곧장 앞으로 나아가도 그리 멀리 가진 못해.'
양을 묶어둘 고삐와 말뚝을 그려주겠다고하니 어린 왕자가 그것 참 웃긴 생각이라며 한참동안 키득거리더니 이윽고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전 책을 덮고서는 잠시동안 달아나는 양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어느 순간 프랑스의 저명한 수학자였던 앙리 푸앵카레가 떠올랐고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던지고 간 추측을 다시금 되내어보게 되었습니다. 공간의 형태에 관한 질문이었죠. 물론 그의 가설을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게 사실일테지만 적어도 제 기억 속에서의 그것은 우주의 형태의 비밀을 풀 수 있을 하나의 단서와도 같은 느낌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오랜 역사를 겪었음에도, 아직 우리가 이해하지 못했던 수많은 비밀들과 미스테리들이 줄줄이 풀릴지도 모를 첫 실마리와도 같은 느낌이었죠.
'밀레니엄 7대 난제'로까지 선정된 푸앵카레의 추측은 마치 비밀스런 성에 갇힌 공주처럼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줄 누군가를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백마 탄 왕자님께 드릴, 수학계 최고의 상인 펠즈상과 100만 달러라는 상금을 준비해두고선 말이예요. 드디어 100여년 만에 왕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가 온라인 사이트에 올린 너무나 간단해보이는 공식이 소문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대부분 그저 미친 놈의 소행일거라 생각했지만, 어느 누가 보기엔 뭔가 그럴싸해 보이기도 했었는지, 수학자들 사이에서 그 공식을 올린 이의 과거에 대한 소문이 점점 넓게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레고리 페렐만. 소문의 근원은 고교 시절 천재 소리를 들었던 러시아의 젊은 수학자였습니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왕자님은 사실, 백마는 커녕 넝마같은 몰골에다 수염이 더부룩하고 이마마저 벗겨진 괴인이었습니다.
그는 증명이란 험난한 가시밭을 지나, 이론이란 탄탄한 벽돌로 쌓여진 밀레니엄 7대 난제의 성을 최초로 허문 영웅이 되어,
우주의 형태라는 공주를 결국엔 세상 밖으로 어렵게 구해냈지만,
사람들은 그 사건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가 얻게 될 부와 영예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그레고리 왕자님은 결국 모든 수상과 상금의 기쁨을 거절하고 다시 은둔 생활에 들어가버리고 말았죠.
그래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또 그가 구해낸 공주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관심없는 채 그저 그가 놓친 부와 영광을 아까워할 뿐이었죠.
그레고리 왕자님은 지금 세상과 단절한 채 함께 살아가는 노모의 아주 적은 연금으로 작은 집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날 어떤 집요하고도 끈질긴 기자가 그를 찾아가 어렵게 취재에 성공한 적이 있었죠.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듯 그 기자 역시, 왜 거져주는 그 큰 상금을 거부했는지를 묻자,
그레고리 왕자님은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 내가 우주의 비밀을 풀고 있는데 그깟 상금이 무슨 소용이 있겠소..."
페렐만의 증명을 전 세계 최고의 수학자들이 검산하는데만 또 수년이 걸렸다고 하니, 그 어려울 추측과, 솔직한 고백을 더해,
하나조차 뭔지 알아보기 힘든 공식으로 가득 찼던 너댓겹의 칠판 속 증명 과정을 당연히 제가 이해 못하는 게 사실일테지만,
그럼에도 전 그 멋진 역사적 사건들을 몇 달동안 취미삼아 즐겁게 추적해보며 한번은 이런 생각을 정리한 적이 있었습니다.
'만약 우주의 형태 역시 어떤 유기체처럼 둥근 모양이라면, 어쩌면 이 세상에서 직선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야.
같은 이유로, 어쩌면 이 우주 안에서의 시작과 끝이란 것은 애초에 아예 존재할 수가 없었다는 말이 되는 거지."
전 다시 한 번 어린 왕자와의 대화를 떠올려보았습니다.
'만약 네가 착하게 군다면, 난 네게 양을 묶어둘 고삐를 그려줄 수도 있어. 고삐를 묶어둘 말뚝도 함께 말이야.' '양을 묶어? 하하하하하하. 그것 참 재미있는 생각이네.' '하지만 녀석을 묶어두지 않으면 미쳐 날뛰다가 어딘가로 도망가버릴지도 모를텐데.' '풉... 하지만 어디로?' '어디든. 줄곧 앞으로.' '....상관없어. 내가 사는 곳은 모든 것이 작으니까.' '...'
이윽고 어린 왕자가 말했죠.
'곧장 앞으로 나아가도 그리 멀리 가진 못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나도 당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봐요. 우린 아주 오랫동안 사랑해온 연인이에요.
그런데 제가 그토록 사랑해왔던 당신을, 지금 이 순간이 우리가 함께 하는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눈 앞에 있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봐요.
"난 지금부터 당신으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지기만 할거야. 안녕."
그리고나서는 정확하게 180도 몸을 돌린 뒤 당신으로부터 한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멀어짐을 위해,
단 1도의 흐트러짐도 없이 정확히 앞으로만, 그게 산이든 강이든 바다든 어떻게든 직진으로만 달아난다고 가정해볼 때,
그러니까 점점 작아지던 제 등이 당신 눈 앞에서 완전히 사라져간 그 시간보다도 수십 배, 아니 수백 배는 더 될
그 기나긴 세월동안 저는 그렇게 당신을 등진 채 한 방향으로만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선 끝없이 멀어지기만 했다고 생각해봐요. 정말 잔인하게도 말이죠.
그리고 당신은 그 자리에 있었죠. 그러다보면 결국 우리는 너무나 당연했음에도 인정하지 않았던 한 가지 사실을 언젠가 서로가 깨닫게 될 거에요.
나의 최종 목적지가, 결국은 또 당신이었다는 사실 말이에요.
그리고 만약 우리에게 영혼이란 것이 정말 있다면,
그리고 그 영혼에게 있어 우주란 곳이 마치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지구처럼 집과 같은 느낌이라면...
게다가 만일 그 우주마저 둥글다면,
우리가 말하는 완벽한 이별, 그러니까 우리가 두려워했던 영원한 멀어짐이라는 개념 자체는 아예 성립 자체가 불가능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에요.
어때요?
만약 그렇다면, 같은 지구에 살아가는 한, 또한 같은 우주에 함께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더이상 멀어질 수 없는 한계점을 가진 가까운 사이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 누군가와 헤어졌다고 해서
그이가 마치 한 순간 세상에서 증발해버린 것처럼 그리워할 필요도 없으며,
설령 사무치게 사랑했던 누군가를 죽음을 통해 잃었다고 해서
제게 남은 나머지 시간들을 슬픔이란 독 안에 가둬버리는 바보같은 실수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게 된 거에요.
마지막으로 난 이렇게 생각했어요.
'만약 우리 안에 영혼이란 것이 정말 있다면,
게다가 우주마저 정말 둥근 모양이라면,
어차피 우리는 헤어진다해도 서로에게서 그리 멀리 떠나가진 못할 테니,
결국 영원한 이별이란 것은 없는 셈인 거지. 그래서,
정말 다행이야.'
'Straight ahead of oneself, one cannot go very f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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