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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전

  • 작성자 사진: YoungKon Joo
    YoungKon Joo
  • 2013년 1월 13일
  • 2분 분량

그곳에서 전 할머니와 함께 경상도의 외진 산자락에 위치한 시골집을 방문하게 되었어요. 그 집에 살고 있는 주인 노파를 만나기 위해서였죠. 노파의 집 바로 옆에 큰 건물 하나가 들어서는데, 그 소음을 견디다 못한 주인 노파의 항의 전화가 꽤나 자주 왔던 모양이었어요. 그 건물은 곧 진행될 아버지가 맡은 대규모 공사의 직원 숙소였죠. 아마도 할머니와 함께 갔었던 것은, 그들을 위로하고 설득시키거나,

아니면 아예 그 시골집을 사들일 계획이지 않았나 싶어요. 우리가 미리 와서 사정을 살피고 있으면 내일 아버지가 내려와 문제를 해결할 예정이었죠.

늦겨울의 시골 풍경은 고요했어요. 거의 다 녹은 눈들이 진초록의 풍경화 군데군데를 하얗게 덧칠해놓은 것만 같았어요. 시골집에 도착했을 땐 사람은 아예 없었고, 창고와 마당 사이에 놓인 벽 가운데 뚫린 작은 구멍 사이로 후두두둑 알굵은 쌀들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어요. 그 모습이 마치 우릴 맞이하는 것 같았죠. 노파가 오늘 해먹을 밥을 준비하는 모양이었어요. 멍석 위로 쌓여가는, 껍질 그대로의 손톱만한 쌀알들을 손으로 만져보며 할머니는 감탄을 금치 못했어요. "아따..쌀 좋네. 내일 느그 아버지 오면 이걸로 밥 해주면 되겠네." "그러면 제가 집주인 할머니한테 돈이라도 조금 드려놓을게요." "치아라, 고마. 내일 느그 아버지 오면 알아서 챙기줄끼다." 쌀을 보며 자식부터 생각하는 따뜻한 사람이면서도, 매번 남에게는 인색한 우리 할머니였죠. 할머니가 손을 탁탁 털며 자릴 옮기자, 집주인 노파가 마당으로 나와 우릴 맞이했어요.

아흔이 넘은 할머니에 비하면 나이가 꽤나 젊어보이는, 고작 예순을 넘긴 정도의 곱게 나이를 먹은 노파였어요. 걱정과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죠.

안방으로 들어가 할머니와 노파가 서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전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보았어요. 벽에는 각설이 분장을 한 노파의 과거 사진이 크게 걸려있었죠. 분장 뒤로 보여지는 노파의 얼굴은 꽤나 아름다웠어요. 그 미모를 숨기기 위해, 그녀는 저토록 짙은 분장을 했었나보다, 라고 전 생각했죠. 그녀에게 있어 자신이 가진 미모는 지독한 저주와도 같은 것이었죠. 저는 그것을 나중에 알게 되요.

그때, 노파의 어린 손녀딸이 우리에게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왔어요. "제 손녀딸 지원이예요." 창백하리만큼 피부가 하얀 소녀는 단아하고 신비로운 얼굴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반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갓 스물이 되었다는 소녀는 숨이 막힐만큼 매력적이었죠. 말수가 적은 소녀의 눈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저는 어느순간 그녀의 아픈 과거를 목격하게 되었어요.

초록이 가득한 들판에 노란 국화꽃이 만개한 어느 날. 누군가 향기에 취한 소녀의 입을 틀어막았어요. 짓궂은 사내아이 두명이 그녀를 어디론가 끌고 갔어요. 소녀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눈물만 흘렸어요. 그녀의 과거 속에서 저는 마치 유령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사내아이들에게 끌려가는 소녀만 바라보며 서있었어요.

가슴이 아팠지만 과거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죠.

그 날의 국화꽃 향기는 어느날보다도 강했어요. 전 그 향기를 잊지 못하죠.

저는 소녀의 아픔을 치료해주고 싶었어요. 평생이 걸려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했죠. 그것은 제 욕망이었고, 소녀의 미모는 저주였죠. 저는 소녀를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노파는 소녀와 함께 마당으로 걸어가 먼 산을 내다보며 말했어요. "이렇게 조용하고 좋은 곳을...저 건물이 들어오고나서 결국 이 꼴이 됐지." 다행히 우리가 찾아간 그 날은 공사가 중단된 상태였어요. 저는 아버지를 설득시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먼산을 바라보는 노파의 옆모습에서 소녀의 모습을 엿보았어요. 노파의 얼굴에서 세월의 탈을 벗겨낸 저의 상상력은, 그녀를 세상 어떤 여자보다도 아름답게 만들어냈죠. 그것은 사실이었어요.

노파는 자신을 포함해 그녀의 손녀마저도 저주받은 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죠. 노파는 사람 한명없는 이 곳에 숨어 손녀를 보호하고 또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었어요.

그들이 가진 아름다움은 모든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었죠. 할머니와 노파가 함께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소녀는 창고를 구경시켜주겠다며 그곳으로 저를 안내했어요. 전 그제야 제 소개를 했어요. "안녕. 난 토르차라고 해."

그리고 전 꿈에서 깨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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