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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전

  • 작성자 사진: YoungKon Joo
    YoungKon Joo
  • 2010년 10월 3일
  • 2분 분량

그곳에서 전 외진 산중에 크게 터를 잡은 명상원에 머무는 명망이 높은 수행자였어요.

그곳엔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수십, 많게는 수백명도 더 될만큼 많았고

각자 자리를 잡아 가부좌를 틀거나 서있거나 어떤 이는 누워서 잠을 자듯 명상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그들 모두가 저를 스승이라 불렀어요.

사실 그런 칭호는 그곳에서의 제겐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죠.

전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침 따위를 주기는 커녕 누군가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경우조차 없었어요.

어느날, 머리가 벗겨진 중년남자 한명이 그곳을 찾아왔어요.

안경 뒤로 보이는 찌푸려진 미간에다 정리되지 않은 수염이 그의 성격을 한 눈에 보여주었죠.

사교성이 좋다거나 말주변이 좋아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그런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죠.

그는 며칠동안 적응기를 가지는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기만 했어요.

많은 이들이 그가 곧 떠날거라 생각하는 눈치였지만-물론 이 곳 사람들은 그런 것에 크게 연연하지 않지만-

전 그가 오랜 시간 머물것임을 진작에 느끼고 있었어요.

어느날, 그가 찾아와 제 앞에 섰어요.

그는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며-사람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그의 습관이었죠.- 간간히 제 눈을 마주치더니,

한참을 지나서야 호흡을 가다듬으며 겨우 입을 열었어요.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주시오."

전 대답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어요.

그는 곧 자신의 태도가 건방지다 여겨졌는지 조금은 겸손하게,

"알려만 주면....하라는대로 다 하겠소."

"모든 것을 비우세요."

"뭘 말이요?"

그가 다시 반문했을 때 전 이미 걸음을 옮긴 상태였죠.

다음날부터 먼 발치에서 그를 지켜보니,

얼마간은 이곳 사람들처럼 이 자세 저 자세로 명상에 잠겨보다가도

다시 벌떡 일어나 화를 내기도 하고 또 자리를 옮겨 다시 명상하다가도 또 금새 화내고. 그러기를 며칠간 반복하더니,

일주일이 지나서야 겨우 몇시간이 넘도록 명상에 잠기는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물론 미간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죠.

그가 또 다시 저를 찾아왔어요.

전 눈을 감고 있었지만 그가 단단히 화나 있음을 그의 거친 숨소리를 통해 느낄 수 있었죠.

"여보시오! 도대체 뭘 비워내란 말이오! 그것만 알려주시오."

"그냥 비워내세요. 하나가 남을 때까지..."

그는 부아가 단단히 올라 금방이라도 절 후려칠 기세였지만, 곧 호흡을 가다듬더니 혼잣말로 뭔가를 중얼거리며 그냥 돌아가버렸어요.

전 그때까지도 눈을 감고 있었죠.

그렇게 몇 달이 지나 다음 계절이 찾아옴과 함께 그가 저를 찾았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하나가 남은 것 같소."

"그게 무엇인가요?"

"....."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어요. 눈물을 참아내는지 말을 먹어가며 그가 겨우 입을 열었죠.

"후회였소. 아무리 비우려고 애써봐도 후회만큼은 머리속에서 떠나지가 않았소."

전 말없이 눈 감은 채 앉아만 있었죠.

그는 한참동안 제 앞에서 식식거리더니 다시 뒤돌아갔어요.

계절이 서너번쯤 바뀌자 그의 마음도 바뀌어 또 다시 저를 찾아왔죠.

그는 여느때보다도 더 오랫동안 말을 꺼내질 못했어요.

한참, 정말이지 한참을 고개만 숙인 채 가만히 서 있더니 주먹을 불끈 쥐고는 제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마지막 하나는 후회가 아니었소."

"그럼 무엇인가요?"

"그리움이었소. 이게 정말 마지막 하나인 것 같소. 이건 정말이지 내게서 떠나가질 않소. 이제 난 무엇을 어떡해야하오?"

"모두 비워내셔야죠."

"다 비워내면 무엇이 남는단 말이오? 도대체."

제 입이 열리길 기다리던 그는, 끝내 답하지 않는 제 모습에 풀이 죽어서는 고개숙인 채 돌아갔어요.

계절이 몇 번이나 흘러갔는지도 모를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고,

어느날 저는 궁금한 마음으로 안부를 확인할 겸 직접 그를 찾아나섰어요.

그는 명상원에서 꽤 멀리 떨어진 아름드리 나무 아래 가부좌를 튼 채 홀로 앉아 있었어요.

처음 보았던 그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길어진 머리는 정수리 위로 둥글게 묶여 있었고, 풍만했던 뱃살이 홀쭉해져 갈비뼈 자국이 보일 정도였어요.

게다가 늘 찌푸려져 있던 미간도 이제는 차분히 이마에 달라붙어있었어요.

그는 제법 훌륭한 수행자가 되어 제 발자국소리조차 듣지못하는듯 미동도 없이 고요하게 앉아있었어요.

저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았어요.

제 작은 숨소리에 그의 눈썹이 반응하는 것이 희미하게 느껴졌는데,

제눈엔 그것이 마치 인정받길 바라는 어린 아이처럼 보였죠.

아마도 그가 깊은 명상에 빠진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어요.

전 다시 발걸음을 돌렸어요. 그제야 등 뒤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전 이제 어찌 해야 합니까? 당신의 말씀대로 끝없이 비워냈습니다. 모든 걸 비워냈습니다.

그런데 남은 것이 하나도 없이 모두 다 비워지고 말았습니다. 전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저는 그를 향해 미소지어보였어요.

"이제야 해냈군요. 이젠 그 하나가 찾아올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될 거예요."

그리고 전 꿈에서 깨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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