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전
- YoungKon Joo
- 2009년 11월 18일
- 5분 분량
그곳에서 전
편한 차림으로 동네를 산책하고 있었어요. 제 옆엔 머리가 큰 친구도 함께 있었죠. 제가 기억하는 어릴 적 동네, 회색 콘크리트 벽돌로 만들어진 2,3층 정도의 높이가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즐비해 있는 그런 동네였어요. 각각의 건물들은 그 생김생김은 같았지만, 상가인 곳들만 철재 간판에 페인트로 이름을 써붙여놓은, 마치 1980년대 초의 부산을 닮은 느낌의 동네였어요.
아무말 없이 걷던 우리는 길가의 전자오락실로 들어섰죠. 출입문을 들어서자 동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열심히 오락기 버튼을 두드리고 있었어요. 일반 오락실 풍경과 다르지 않았지만 유독 제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오른쪽 벽면에 오락기 대신 배치된 PC 3대였어요. 그곳엔 3명의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죠. 맨 왼쪽 여자는 책상 옆에 동전박스를 쌓아놓은 것으로 보아 분명 이 곳의 주인임이 틀림없었고,
나머지 두명은 주인과 친한 친구들 쯤일거라 전 생각했어요. 제 친구가 주인 여자에게 동전을 바꾸러 간 사이, 전 그저 제자리만 서성이다가 맨 오른쪽에 앉은 여자가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서로 눈이 마주쳤어요. 분명 안면이 있는 여자였지만 누구인지 뚜렷이 기억나지 않자
우리 사이엔 짧은 순간 어색한 공기가 흘렀고 전 그게 싫어 가볍게 고갤 꾸벅거리며 상황을 넘겨버렸어요. 그녀는 저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환하게 웃어보이며 목례했어요. 대부분의 한국 여자는 모르는 남자에게 웃으며 인사하진 않으니까, 절 잘 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죠. 동전을 바꾼 친구가 그녀를 알아보고선 함께 웃으며 몇마디를 나누더니, 제게 함께 다가와 함께 밥을 먹으러 나가자고 했어요. 전 그때까지도 그 여자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어요. 우리는 밖으로 나와 셋이서 함께 걸었어요. 친구와 그녀는 굉장히 친한 사이처럼 많은 이야길 나눴고
그러면 그럴수록 전 한 걸음 물러서 걸으며 음식점 찾기에만 몰두했어요. 참 괜찮은 여자인데 친구와 더 친한 사이니까 전 그녀와 더이상 친해지지 않는 것이 예의라 생각했어요. 마땅한 음식점이 없어 뭘 먹고 싶은지 의견이나 물어볼 겸 뒤를 돌아봤을땐 그녀가 아예 친구의 등에 업힌 채 다가오고 있었죠. 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기다렸어요. 그들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것이 질투의 행위로 보일 것이 염려돼
고갤 반쯤 옆으로 돌리자 주인 없는 구멍가게가 하나 보였어요.
길 모퉁이에 있는 가게였는데 1980년대 초의 여느 구멍가게처럼,
안에는 과자나 고무장갑, 칫솔 따위의 온갖 잡화들이 나무 선반위에 정리되지 않은 채 올려져 있었고, 가게 밖에는 작은 평상 두개가 출입로 양쪽으로 배치되어 있어 그 위로 불량식품 따위의 값싸고 소소한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죠. 가게를 따라 모퉁이를 끼고 돌자 큰 아름드리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나무 그늘 아래로 하얀색 칠이 벗겨진 평상과 각기 다른 의자들이 놓여있었는데, 평상의 좌우측엔 모양과 색이 다른 의자가 하나씩, 평상 뒤쪽엔 3명이 앉기에 딱 좋을만한 쥐색 레자 쇼파가 껍질이 군데군데 벗겨진 채 놓여있었어요. 하나하나 그 어느것과도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그 색과 모양이 제각각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그 모순과 어울리지 않음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아름다워 보였어요. 전 그곳에 넋이 나가 한참을 바라보며 서 있었어요. '저곳에 셋이 함께 앉아 음식을 시켜 먹어도 좋겠는걸. 중국요리도 좋고 피자도 좋을테고...무엇이든...' 평상에 둘러 앉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삼인용 쇼파에 나란히 앉아 함께 먹는다는 상상에 저는 왠지 기분이 좋아졌어요. 그때쯤 그들이 제 옆에 도착했는데 친구는 갑자기 집으로 가야겠다며 급하게 그곳을 빠져나갔어요. 전 어색하게 그녀와 단 둘이 걸었죠.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였지? 난 어디서 이 여자를 봤던 걸까?' 제가 기억을 더듬으며 고민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저를 아주 편한 사람처럼 대해줬어요. 우린 높다란 언덕 앞에 섰어요. 언덕길로 첫 발을 대딛는 순간 등 뒤로 부드럽고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어요. 그녀가 제 등을 끌어안듯 감싸더니 부드럽게 업히는 것이었어요.
그 체온과 향기가 싫지 않아서 전 그녀를 자연스럽게 업었어요. 제 두 손위에 올려진 핫팬츠를 입은 그녀의 허벅지는 그 무엇보다 부드러웠죠.
언덕을 오르는 길은 집도 사람도 울타리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단지 한종류의 큰 과일나무들만 빼곡했죠 마치 날개 세 개 달린 부메랑 모양의 잎사귀와, 초록색에 군데군데 빨간색이 덧씌워진 사과같은 모양의 과일이었는데 손 내밀면 닿을만큼 가까운 곳에 주렁주렁 열려있었기에 전 그것이 분명 먹지 못하는 과일일거라 확신했죠. 만약 먹을 수 있는 과일이었다면 이 길을 오가던 사람들이 벌써 다 따버리고 없었을테니까... 그녀는 제 등에 업힌 채 손을 뻗어 과일을 따보려 바둥거렸어요. "이건 무슨 과일인가요?" "아마 먹지 못하는 과일일거예요." 아무리 애를 써도 따지 못하는 그녀에게 과일 하나를 대신 따서 건네주었어요. 그것은 알찬 사과는 커녕 속이 텅텅 빈 피망같은 느낌이었죠. 전 다시 나무를 유심히 살펴보았어요. 과일의 크기가 유난히 크긴 했지만 분명히 제가 아는 나무였어요. "무화과예요. 잘 봐요. 무화과의 속은 빨개요." 전 그녀에게 과일을 넘겨 받아 바닥에 세게 던져보았어요. 다행히 제 추측대로 속은 빨갰어요. 그녀는 뭔가를 처음 접한 아이처럼 신기해했죠.
한참을 더 올라갔습니다.
언덕은 의외로 높았지만, 전혀 힘들지는 않았어요. 어느 지점에 다다랐을때 그녀가 어떤 나무를 가리키며 물었죠. "어머. 이 나무는 뭐예요?" 언덕길을 덮은 무화과 나무들 사이로 가늘고 긴 나무 한그루가 우뚝 솟아있었어요. 잘고 동그란 잎사귀들, 하얀 꽃망울, 그 향기마저 분명한 아카시아였죠. "아카시아 나무예요. 그런데...신기하네요." "왜요?" "꽃이 피어있네요..지금은 가을인데 말이예요. 아카시아는 늦봄에 피거든요." "꽃이 너무 예뻐요. 향기도 좋고." "맛도 좋아요." 그녀의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그 맛을 상상하며 웃고 있을 표정이 등 뒤로 느껴졌어요 언덕 꼭대기에 도착하자 그녀가 제 등에서 내렸죠. 길 왼쪽에는 단아하고 하얗게 단청 되어있는 큰 절이 있었어요. 단청은 화려한 색들의 조화가 그 생명인데 저런 식의 단청은 참 매력이 없다고 생각할 때쯤, 그녀가 갑자기 그 절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전 그녀의 이야기가 너무 좋았어요.
듣는 이로 하여금 이미지를 떠오릴 수 있도록 배려하는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표현과 그같은 따스함에 꼭 어울리는 그런 목소리였죠. 쓸데없이 장단을 맞춰줘야한다거나 이야기에 집중할 호흡조차 주지 않는 그런 수다쟁이 여자들의 말투가 아니었어요. 그러다 결국 단청 이야기로까지 번졌는데 "저기 단청할때 영곤씨 아버지랑 형, 심지어 사촌동생 정환씨까지 고생이 많았죠. 정환씨는 원래 토목과에 다니던 학생이었어요. 그러다 이건 뭔가 아니다 싶었죠. 그래서 학교를 쉬고 형을 따라다니며 단청도 해보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도 많이 해봤죠. 하지만 그것조차도 아니었나봐요. 그때쯤 영곤씨가 물어봤죠. 가장 하고 싶은게 뭐니.
정환씨는 그 단순한 질문을 스스로 찾지 못하고 있던 거예요. 그러다 글을 써보고 싶다고 말했고 영곤씨는 그럼 해봐 지금 당장이라고 말했었죠. 그렇게 정환씨는 늦깍이 문예창작과 학생이 되었죠. 게다가 장학생으로 말이예요." 저는 깜짝 놀랬어요. 그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 말투와 어조는 분명 제가 혼잣말을 하듯 사람들에게 나의 가족사나 어린 시절을 풀어놓는 방식이었거든요. 그녀는 분명 제 생각보다도 더욱더 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확신하게 되었죠.
전 다시 머리 아픈 고민에 빠져들었어요. '도대체 당신은 누구지? 만약 이제와 당신이 누군지 물어본다면 정말 큰 실례가 되겠지?' 찾아내기 힘든 기억의 서랍들을 뒤적이며 전 그저 그녀의 말들에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어요. 조금 더 걸어가자 언덕이 끝나고 내리막길이 시작되었어요. 그 경사가 눈으로 보기에는 45도 정도는 족히 기울여진 -물론 그 정도로 보인다면 실제로 30도의 경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만큼- 위험한 길이었죠. 언덕 아래로 첫 발을 내딛자 그녀가 다시 제 등에 기대며 마치 흘러내리듯 온 체중을 실으며 업히는 것이었어요. 올라올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오히려 내려가는 길 위에서는 당장이라도 주저앉을듯 무겁고 힘겹기만 했어요.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티내지 않으려 애썼어요. 다행히 한번도 넘어지지않고 다 내려왔을땐 골목이 많은 달동네였어요.
그녀는 다시 제 등에서 내려 옆에서 함께 걸었죠. 전 부끄러웠어요. 분명 제가 힘겹게 내려왔다는 걸 그녀도 느꼈을거라 생각했죠. '그래서 내린게 아닐까?' '미안해요. 다시 업히세요. 여기서부턴 충분히 업고 갈 수 있어요.'라 말하고 싶었지만 유치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여자의 몸을 한번이라도 더 만져보려는 불순한 의도처럼 보여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저보다 반 걸음 정도 앞장서서 걷고 있었어요. 그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호기심 가득한, 하지만 그보다 더 온화한 그런 미묘하고도 아름다운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다 왔어요." 그녀가 말했죠.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고갤 들어 주위를 살펴보니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동네, 바로 그 집앞이었어요. 그녀는 저를 바래다주고 있었던 것이었죠. "들어가세요." 그녀가 해맑게 웃어보이며 인사하자 전 왠지 후회할거란 생각에 용기내어 물었어요. "죄송해요. 전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아요. 정말 죄송해요." 그녀의 표정이 이내 어두워졌죠. "실망이예요." 수치스럽고 괴로웠어요. "전 정주예요." -실제로는 전혀 알지 못하는-그 이름을 듣는 순간 짧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며 '아..아~아!'라는 마치 신음과도 같은 감탄이 새어나왔어요. 그녀는 제가 아는-적어도 그 곳에서는- 어떤 누나의 친 동생이었어요. 언젠가 잠깐 가진 술자리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엔 별 다른 매력이나 존재감이 없는 그런 여자였었어요. 그리고 분명 자기보다 나이가 몇 살 많은 애인이 있다고 말한 사실도 기억해냈죠. "잘 들어가요. 전 이제 오빠 만나러 가요." 그녀가 제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어요.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가는 차가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렇게 전 꿈에서 깨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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