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 전
- YoungKon Joo
- 2009년 11월 15일
- 3분 분량
그곳에서 전 화가들이 많이 사는 시골 마을에 혼자 살고 있었어요. 마을 옆에는 크고 깊은 강이 흘렀고, 경사가 낮은 넓은 초원 위로 작은 집들이 촘촘히 들어선 평온한 마을이었죠.
어느날 강가 옆 작은 길 모퉁이를 지나는데 어느 할아버지가 제게 그림 한 폭을 사지 않겠냐며 말을 걸어왔어요. 너비가 2미터 정도 되는 화선지에 그려진 산수화였는데 전 그 그림이 꽤나 마음에 들었어요. 할아버지는 백만원 정도의 큰 금액을 요구했지만 전 왜 그랬는지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흥정을 시도했어요.
"오만원에 주시면 생각해볼게요."
당연히 할아버지는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어요.
전 아쉬우면서도 왠지 잡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다시 절 불렀어요. "젊은이! 인상도 좋고 하니 내 그 가격에 그냥 주리다."
전 기분 좋게 그림을 받아 집으로 왔어요.
그날 이후 그 할아버지는 다시 볼 수 없었죠.
그 그림을 산 이후부터 가까운 이웃들에게 안좋은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누군가가 갑자기 불치병에 걸리는가 하면 어떤 집에서는 불이 나는 식의 크고 작은 나쁜 일들이 주변에서 이어졌어요. 다행히 제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이유 때문에 '어쩌면 악재들이 모두 내 탓인 건 아닐까?'란 질문이 생겨났고 결국엔 제가 사온 이 그림이 악재들의 이유라고 어느순간 저는 확신하게 되었어요. '그림에 저주가 붙은 것이 분명해.'
전 그제야 할아버지의 얄팍한 꽤를 파악했죠.
거져준다면 사람들이 의심할 것이 분명했기에 아예 높은 가격을 불러 마치 그 그림이 큰 가치가 있는 것마냥 보이게끔 속였던 것이었어요. 그러니 말도 안되는 싼 가격에 팔 수 있었겠죠. 처음엔 할아버지와 같은 수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그림을 팔면 어떨까란 고민도 해봤지만,
왠지 모르게 이 나쁜 일들은 저에게서 끝이 나야한다는 결심이 왠지 모르게 더 강했어요. 마치 절대반지와 운명을 함께 한 프로도처럼...
그때쯤 전 꿈속이었음에도 이것이 악몽임을 인지하고선 잠시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지만,
뭔가 어딘가에서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나온듯한 껄끄러움 때문에
그 그림을 확실히 처리해야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저는 다시 눈을 감았어요. 신기하게도 전 다시 그 꿈으로 들어갈 수 있었죠.
전 어떤 의지에 의해 먹으로 그려진 그 그림에 채색을 하기 시작했어요.
붉은 색과 초록 색, 파란색으로 산수에 색을 채워넣었어요. 얼마동안은 악재가 줄어드는 듯 보였지만 말끔히 사라진 건 아니었죠.
그냥 태워버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썩 내키는 방법은 아니었어요.
그렇게 불안함에 시달려가던 중,
하루는 꿈속에서 또 꿈을 꾸었는데, 얼굴이 새카만 넝마가 나타나 그림에 대해 말해주는 것이었어요. 꼭 도깨비같은 몰골의 그는 "그 그림의 저주는 당신이 없앤다고 풀릴 가벼운 문제가 아니야."라고 말하고선 사라졌어요. 꿈에서 깬 저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선 도와줄 이를 찾기 위해 마을 이곳 저곳을 수소문하며 헤매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동양화들로만 전시된 강가 옆의 큰 화랑을 지나치는데
왠지 그곳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그림에 대해 조금의 정보라도 가지고 있을거란 생각에 저는 곧장 그곳엘 들어갔어요.
화상은 덩치가 제법 크고 말끔한 화가였는데 그곳에서 파는 그림은 모두가 자신이 그린 것이라고 설명해주었어요.
전 그에게 제 그림을 펼쳐보였죠. "이 그림에 저주가 걸려있는 것 같아요." 그는 붓의 획 하나하나와 화법들을 입으로 중얼거리며 한참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어떤 부분은 강한 저주가 걸려있는 것 같지만, 또 어떤 곳에서는 굉장히 훌륭한 화법을 쓰기도 했군요. 흔치 않은 그림이예요." 그가 그림에서 눈을 떼 저와 눈이 마주쳤을때 전 그가 누구인지 곧장 알아볼 수 있었어요.
그는 분명 꿈에 나왔던 그 넝마였어요. 전 그림을 없앨 수 있게 도와달라고 간청했지만 그 역시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진 못했죠.
화랑을 나와 또 다른 정보를 찾아 한참동안 마을을 헤매던 중
어떤 할아버지로부터 그것은 특별하게 제조된 도구로, 특정한 차를 폭파해, 그 잔해들과 함께 특수한 기름으로 불을 붙여야만 악재까지 말끔하게 없앨 수 있다고 했어요.
할아버지와 전 어느 달 밝은 밤에 그가 지정한 차로 몰래 다가가 어렵게 구한 폭파 도구를 놓고선 이내 차를 폭파시켰어요. 전 왠지 차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그런 마음을 파악했는지 할아버지는 불타는 차를 보며 제게 말했어요. "누군가는 희생되어야만 악재를 없앨 수가 있다네." 바로 그 누군가의 차가 화마에 휩싸여 활활 타오르고 있을때쯤,
갑자기 우리 앞에 있었던 터져버린 폭파 도구가 서서히 다시 생겨나기 시작했어요. 전 강렬한 불안을 느꼈어요. '분명 폭파해야할 차를 잘못 지정했기 때문일거야.' 강하게 죄어드는 조급함과 불안함.
그 강렬한 감정들이 저로 하여금 자꾸만 잠에서 깨도록 자극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저는 억지로 눈을 감고 끝까지 꿈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버텨보았죠.
의식이 점점 돌아올수록 꿈 밖의 현실세계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
또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느껴졌지만 전 철저히 그것들을 외면하려 노력했어요. 전 빨리 그림을 없애야했기에 할아버지와 함께 아직 식지도 않은 뜨거운 자동차의 잔해들을 모아
기름과 함께 그림에다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저 못지 않게 할아버지도 꽤나 다급해 보였어요. "어서 마무리해!" 그림이 불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며, 기분좋은 개운함 뒤에 어쩌면 이게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무서운 생각이 따라오기 시작했어요. 꿈에서 본 넝마. 화랑의 주인. 그의 그림들. 그리고 불타는 이 그림...전 어느 순간 알게 되었죠.
바로 그 화랑의 주인이 이 그림을 그린 범인이며 또 다른 저주들이 그에 의해 계속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전 어찌할 바를 몰랐어요.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제 꿈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었어요. '제발 그림이 빨리 타서 모두 사라지길...' 그림이 다 타는 걸 보지 못한 채, 현실과의 의식 싸움에서 졌기에
결국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그리고 전 꿈에서 깨어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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